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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 박물관 유물 이야기] 선비문화의 샘, 벼루
2024-12-09 hit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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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 박물관 유물 이야기

선비문화의 샘벼루

박물관 학예사

황보 경

 

<사진 1> 백제 벼루(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2> 집안 사신총 필신도


<사진 3> 거북모양 자석연


<사진 4> 운룡문 오석연

 

벼루[硯]는 종이와 붓, 먹[墨]과 함께 문방사우(文房四友) 또는 문방사보(文房四譜)라 일컫는데, 만든 재료에 따라 토연(土硯), 도연 (陶硯), 석연(石硯), 옥연(玉硯), 동연(銅硯) 등 다양하게 불린다. 벼루의 기원은 중국 진(秦)나라 때 축조된 진묘(秦墓, B.C. 217)에서 돌벼루가 출토된 바 있고, 한(漢)나라 때에도 칠연(漆硯)과 도연, 목연, 죽연 등 다양한 벼루가 제작됐다.


우리나라에 벼루가 도입된 시기는 삼국시대로 고구려와 백제에서 평면이 원형이면서 다리가 여러 개 달린 것을 사용했으며(사진 1), 신라와 가야도 백제 및 중국의 영향을 받아 원형과 장방형 벼루를 사용하 다가 점차 방형 벼루로 변화했다. 도입 초반에는 흙으로 만들어진 토제 벼루를 주로 사용했고, 도성을 중심으로 관청과 성곽, 사찰 등에서 문서 작성과 경전을 필사하는 데 쓰였다. 특히 고구려 고분벽화 중 중국 지안(集安)에 위치한 ‘사신총’에는 붓과 벼루 혹은 연적처럼 보이는 그릇을 들고 글씨를 쓰는 ‘필신도(筆神圖, 사진 2)’ 1) 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서 일찍부터 붓과 벼루를 사용해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을알 수 있다.


그러다가 8~9세기에 이르러서는 남북국시대 신라 왕경(현재의 경주)을 비롯해 지방에서 석제 벼루가 유행했는데, 이들 상당수가 당 (唐)나라에서 수입된 것으로 관료층은 물론 지방의 호족들도 문방구로 사용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이천 설봉산성에서 출토된 ‘함통(咸通)’ 명 풍자연(風字硯)이 있는데, 바닥 면에 ‘咸通六年’ 이 새겨져 있어서 865년에 사용된 벼루임이 밝혀졌다.


석제 벼루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져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 이고, 도자기로 제작된 벼루도 유행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석제 벼루는 자석연(紫石硯)과 오석연(烏石硯)으로 돌의 색깔이 자주색과 검은색을 띠고 있으며, 산지로는 강원도 평창을 비롯해 계룡산과 남포·단양·무산·장단·정선·안동·경주 등 전국 여러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평창 자석연은 품질이 우수하고, 색깔이 고급스러워 조선 시대 왕실은 물론 명(明)나라에도 수출할 정도였다고 한다.


우리 박물관은 자석연과 오석연으로 만들어진 벼루를 소장하고 있는 데, 거북모양 자석연과 운룡문 오석연이 대표적이다. 거북모양 자석 연은 구형연(龜形硯)이라고도 하는데, 연변(緣邊)에 거북 머리와 네발, 꼬리가 조각돼 있고, 안쪽의 연당이 경사져 있어서 먹물이 연지로 모이도록 만들어졌으며, 뚜껑은 거북등 모양이다(사진 3). 운룡문 오석연은 평면이 장방형으로 연변을 따라 구름과 용 문양이 조각돼 있어서 입체적으로 보이고, 연당과 연지가 구분된 점이 특징이다(사진 4). 한편, 벼루에 새겨진 거북과 용 문양은 장수와 풍요, 권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벼루는 문방사우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는 문방구로 주인보다 오래 사는 예술품이자 유물로서도 가치가 높다. 이런 벼루에 먹을 가는 동안 선비들은 숱한 고민을 헤아리며, 마음을 닦았을 테다. 이것이 바로 수신(修身) 즉, 마음과 몸을 바로잡아 수양하는 방법 중하나였다. 현대인 중에도 서예를 배우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긴 겨우내 집 안 어딘가에 있을 벼루를 꺼내 먹을 갈아 글씨를 쓰면서 잡념을 없애보는 건 어떨까. 


[ 참고자료 ] 

● 도라지, 「삼국시대 벼루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7. 

● 장재천, 「문방사우의 교육문화적 의의」, 『한국사상과 문화』 5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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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라지, 「삼국시대 벼루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쪽(삽도 8 전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