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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 박물관 유물 이야기] 결혼의 상징물 목기러기
2024-09-04 hit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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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 박물관 유물 이야기 

결혼의 상징물 목기러기

박물관 학예사

황보 경



<사진 1>


결혼을 알리는 신혼부부들의 청첩장을 받아 보기가 쉽지 않은 요즘, 전통혼례식을 올리는 경우는 더욱 드물어서 대례상 위에 놓인 목기러기〔木雁〕를 구경하기가 어려워졌다. 물론 신식결혼을 올릴 때 폐백(幣帛)의 1) 절차를 여전히 지키는 곳도 있어서 작은 목기러기 한 쌍을 볼 수도 있지만, 이제는 제대로 만든 목기러기를 보기 위해서는 박물관에 찾아가서 봐야 하는 세상이 됐다.



<사진 2>


기러기는 오래전부터 원앙과 함께 부부 금슬(琴瑟)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으며, 이에 따라 혼례에서 사용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우리나라의 전통혼례는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데, 원래 조선시대 이전에는 3일간 계속됐다고 한다. 첫날은 신랑이 신부에게 혼례의 징표로 기러기를 바친 다음 합방(合房)했고, 둘째 날은 신랑과 신부쪽 친척들이 상견했으며, 셋째 날 잔치를 벌였다. 이러한 절차를 조선 시대부터는 하루로 줄여서 전안례(奠鴈禮) → 교배례(交拜禮) 2) → 합근례(合巹禮) 3) 순서로 진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혼례의 장소는 왕실과 일부 사대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신붓집에서 거행됨에 따라 신랑은 조랑말을 타고, 기러기는 기럭아비가 4) 붉은 비단에 싸서 행렬의맨 앞에 서서 신붓집으로 향했다(사진 1). 혼례 때는 원래 산 기러기를 써야 하는데, 그 이유가 『주자가례(朱子家禮)』 5) 에 의하면 “기러기는 음양에 따라서 오고 가는 뜻을 취하고, 다시 짝을 맺지 않는다는 뜻을 상징하고 있어서이며, 산 기러기가 없는 경우에는 나무 기러기를 사용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때로는 목오리〔木鴨〕나 목원앙(木鴛鴦) 이 사용되기도 했다.



<사진 3>


한편, 기러기는 사랑을 상징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는데, 혼례 때 산기러기를 신랑이 신붓집에 주면, 신부 어머니나 하녀가 치마에 싸서 들어가는데, 지방에서는 기러기를 방 안에 있는 신부 앞에 슬쩍 밀어 그대로 서면 아들을 낳는다 하고, 넘어지면 딸을 낳는다고 믿었다. 그만큼 기러기와 관련된 신혼 첫날밤에 대한 민담(民譚, 에피소드)이 많았음을 엿볼 수 있다.

혼례에 사용하는 목기러기의 특징은 몸통과 목 부분을 따로 만들어서 결합하는데, 눈과 코, 부리를 세부적으로 묘사하기 위함이다. 몸통에는 날개와 깃털을 새겼고, 꼬리는 들려 있어서 몸통과 수평을 이루고 있는 것이 많다. 그리고 적색과 청색, 백색 등을 사용해서 채색을 하고, 최종적으로 옻칠을 해 변형을 방지했다(사진2·3). 아마도 결혼을 한 부부의 집에는 목기러기 한 쌍이 안방이나 거실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데, 만약 제자리에 없다면 오늘이라도 찾아서 가족들이 항상 볼 수 있는 자리에 놓아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 참고자료 ]

● 송미화, 2024, 「한국전통혼례과정의 대례행례고」, 『민족문화논총』 86.

● 유해철, 1982, 「조선시대 목안에 관한 연구」, 『논문집』 15-2, 청주대학교.

● 인터넷 한국민족대백과사전, 검색어: 기러기, 폐백.

● 사진 출처: <사진 1>국립중앙박물관, <사진 3>국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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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폐백이란, 신부가 혼례를 마치고 친정을 떠나 시댁으로 와서 여러 시댁어른에게 인사를 드리는 혼례 의식 이다. 신부는 친정에서 준비해 온 술과 대추 등의 과일 등을 상 위에 올려놓고, 시댁어른들에게 큰절을 하고 술을 올리며, 시부모는 며느리 치마에 대추를 던져주며 ‘부귀다남(富貴多男)’하라고 당부한다.

2) 교배례는 첫 상견례를 하면서 좨주(祭酒)한 뒤 상견주를 마신다.

3) 합근례는 언약례로 신랑과 신부가 술잔을 주고받으며 혼인 서약을 하는 절차이다.

4) 기럭아비는 기러기를 들고 가는 사람으로, 신랑 측에서 가장 복이 많은 사람을 선정했다. 김홍도의 「풍속 도화첩」을 보면, 신랑 행렬 앞에 비단에 싼 목기러기를 안고 가는 기럭아비의 모습이 보인다(사진 1).

5) 『주자가례』는 『문공가례(文公家禮)』라고도 하며, 주자(1130~1200, 남송)가 유가의 예법을 서술한 책으로, 관혼상제(冠婚喪祭)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고, 고려시대 말에 주자학과 함께 전래돼 조선시대에 왕실과 사대부, 일반 서민에게까지 기본 강령으로 채택돼 보편화됐다.